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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않은 진실, 끝까지 추적한 사람 – 영화 〈암수살인〉 리뷰

by pocket100 2025.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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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수살인> 포스터. 포스터 잘나왔다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영화 〈암수살인〉(2018)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한국형 범죄 드라마로, 자극적인 폭력이나 반전보다 ‘진실을 밝히는 과정’ 자체가 중심에 있는 묵직한 작품입니다. 김태균 감독이 연출을 맡았으며, 김윤석주지훈이라는 연기파 배우들의 만남은 영화에 깊이를 더해줍니다.

실제 2007년 부산에서 발생한 미제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암수살인(暗數殺人)’이라는 용어를 대중에게 각인시켰습니다. 암수살인이란, ‘피해자가 존재하지만 신고되지 않아 수사기관이 인지하지 못한 사건’을 의미합니다. 영화는 이러한 암수사건을 단순히 수사 스릴러로 소비하지 않고,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진실’을 끝까지 추적하는 한 형사의 이야기로 풀어냅니다.

 

자백은 있었지만, 사건은 없었습니다

부산 형사 김형민(김윤석)은 어느 날, 교도소에 수감 중인 살인범 강태오(주지훈)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일곱 건의 살인을 저질렀지만, 경찰은 단 한 건만 알고 있다는 충격적인 자백을 합니다. 실제로 강태오는 한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복역 중이며, 그 외 나머지 여섯 건의 살인은 수사 기록에조차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김형민 형사는 처음에는 강태오의 진술을 반신반의하지만, 그가 제공한 피해자들의 신상 정보, 살해 시기와 장소 등은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사실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진술들을 입증할 수 있는 단서가 전혀 없었습니다. 시신도 없고, 실종 신고도 없으며, 목격자도 없는 상황. 경찰 내부에서는 ‘굳이 문제를 만들지 말라’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김형민 형사는 혼자서 수사에 뛰어들게 됩니다.

그는 자비로 사건을 기록하고, 강태오의 면회를 반복하며 조금씩 진실을 파헤쳐 나갑니다. 강태오는 정보 제공을 빌미로 교도소 생활의 편의를 요구하고, 수시로 말을 바꾸며 형사를 시험합니다. 그러나 김형민은 한 걸음씩, 묵묵히 추적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야산에서 강태오가 유일하게 숨기고 싶어 했던 한 여성의 시신을 찾아내게 됩니다.

 

'반전'이 없는 반전극

〈암수살인〉은 전형적인 반전 스릴러는 아닙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있고, 영화 초반부터 강태오의 자백이 진실일 가능성을 충분히 암시합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이유는, 사건을 입증할 수 있는 물증과 정황이 전혀 없다는 점 때문입니다.

강태오는 자신이 모든 걸 통제하고 있다는 듯 여유로운 태도로 김형민을 시험합니다. 그는 교도소 안에서 일종의 ‘심리 게임’을 벌이며, 자백을 무기로 형사를 조종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 형사에게만 불리한 것이 아닙니다. 강태오 역시 점점 자신이 그린 계획의 틈을 허용하게 되고, 결국 진짜 숨기고 싶었던 범죄가 드러나며 무너집니다.

영화의 가장 큰 반전은 그가 끝까지 숨기고 싶었던 피해자가 누구였는지 밝혀지는 순간입니다. 그녀는 그의 연인이었으며, 그가 처음부터 숨기고 싶었던 진짜 이유는 감정이 얽힌 범죄였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에서 주지훈 배우의 표정 변화와 심리 묘사는 관객의 숨을 멎게 할 만큼 절제된 연기력을 보여줍니다.

 

절제된 서사, 강한 몰입감

이 영화는 매우 절제된 연출을 통해 진정성을 확보합니다. 배경음악은 최소화되어 있으며, 사건을 재구성하는 장면은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으로 묘사됩니다. 김형민 형사가 범죄를 하나하나 기록하고, 진술의 신빙성을 확인하며, 관련자들을 찾아가는 과정은 흥미롭기보다는 때로는 고통스럽고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현실 수사의 모습입니다.

특히 ‘진짜 피해자’가 어떤 이유로든 사회적으로 잊혀지고,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은,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가장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범죄는 피를 흘리고, 뉴스를 타야만 존재하는 것일까요? 이름도, 시신도 남지 않은 이들이 정말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요?

감독은 이런 질문을 영화 내내 무겁게 던집니다. 그리고 이에 답을 주는 건, 오직 김형민이라는 인물의 태도입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기록하고, 믿지 못하겠는 증언조차 검증하며, 끝까지 피해자들의 이름을 되찾기 위해 싸웁니다. 그의 신념은 어느 순간 관객의 감정과 겹쳐지며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김형민 형사와 강태오 현장검증 장면

극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다

김윤석 배우는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무게감 있는 연기를 선보입니다. 감정을 폭발시키기보다는, 일상 속에 녹아든 ‘분노와 슬픔’을 억제하며 전달하는 방식은 형사라는 인물에 현실성을 부여합니다. 반면, 주지훈 배우는 이 작품을 통해 연기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차분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눈빛, 적절한 억양과 말투의 변화, 그리고 극 후반 감정의 붕괴까지, 강태오라는 캐릭터를 완벽히 소화해냈습니다.

 

기록되지 않은 진실과 싸운 한 사람의 이야기

〈암수살인〉은 단순한 스릴러가 아닙니다. 이는 단지 사건을 해결하는 영화가 아니라, '누군가는 기억해야 하는 진실'을 조명한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말합니다.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고, 신고되지 않았으며, 수치상 존재하지 않았던 수많은 피해자들이 있었다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위해, 누군가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요.

화려한 액션이나 극적인 반전 없이도 관객의 가슴을 깊게 때리는 영화, 〈암수살인〉. 진짜 스릴은 ‘사건’이 아니라 ‘태도’에서 온다는 것을 보여준, 의미 깊은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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